절대 깨어지지 않는 확신과 믿음으로 꿈을 좇은
탈북민 제1호 변호사 이영현


“제가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던 이유는 ‘믿음’이었습니다.”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꿈을 가지고, 꿈을 믿고,
포기하지 않고 정진해나가는 패기와 열정을 가져보세요.”



글 임지현  |  사진 최승대


2019년 어느 봄날, 대한민국에 탈북민 제1호 변호사가 배출됐다. 15살의 나이에 탈북해 학교를 제대로 다닌 기억이 없던 이영현 씨는 20살에 대한민국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고, 주변의 만류와 자신과의 싸움, 높디높은 문턱을 넘어섰다. 북한에선 몸소 먹거리를 찾아 나서야 했기에 학교에 다닐 형편이 안 됐다. 중국에 거주한 5년 동안엔 신분을 숨기기에 급급해 학교에 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한창 공부해야 할 나이에 펜 한 번 잡아보기 힘들었던 그는 공부에 대한 열망을 남다르게 키워나갔다.


“중국에서 페인트칠과 같은 막노동을 주로 했어요. 밧줄을 몸에 묶고 건물 외벽 페인트칠을 하다 보면 창 안 풍경을 볼 수가 있거든요. 언젠가 한 번은 창을 통해 같은 또래들이 건물 안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봤어요. 나는 밖에서 페인트칠하는데, 그 친구들은 교실에서 공부하는 상황이었죠. 마냥 바라봤는데, 교실에서 공부가 하고 싶더라고요. 공부할 기회가 있다면 무조건 열심히 해야겠다 다짐했죠.”


이영현 씨는 하루하루 먹고살기가 힘들었기에 꿈을 꾼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는 그저 공부가 하고 싶었다. 때문에 한국에 들어와 대한민국 국민의 지위를 얻은 20살의 나이에 곧장 대안학교에 입학했고, 고등학교의 공식 절차를 밟아 졸업했다. 북에서 중학교도 채 졸업하지 못했던 사실이 무색하게도 고등학생 때 꽤 우수한 성적을 냈고, 마지막 학년을 앞두고 진중히 진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떤 꿈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할지 고민하다가 저의 지난 삶을 쭉 돌아봤어요. 그랬더니 제가 만났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북한 정권으로부터 인권을 침해당하는 북한 주민들과 탈북 이후 만난 수많은 탈북민을 향한 감동이 마음 한켠에서 떠나지를 않더라고요.”


이영현 씨는 마음의 시선을 좇았고, 개인의 안락을 추구하기보다는 나라와 민족, 고향 사람들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결단했다. 그렇게 대학 진학을 앞두고, 마침내 애타게 기다리던 꿈을 찾았다. 다름 아닌, 법조인이었다. 탈북민과 북한 주민의 법적 권리와 자유를 지켜주고 보장해주는 법조인이 되겠다는 확고한 뜻을 품었다. 이후 주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선포했다. 본인은 반드시 변호사가 될 것이라고, 북한인권변호사가 될 것이라고 전하며 기도를 요청하기도 했다.



처음 결단을 선포하며 다닐 때, 그 꿈을 만류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20여 년 동안 학업 공백기가 짧지 않았고, 이제 막 알파벳과 이차방정식을 배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그가 주변의 만류에도 개의치 않을 수 있던 이유는 바로 ‘확신’이었다고 고백한다.


“처음 법학대학을 입학했을 때나, 다섯 번의 변호사시험 응시 기회 중 다섯 번째 시험을 보러 가기까지나 제가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던 이유는 ‘믿음’이었습니다. 신앙으로 말미암은 믿음, 그리고 확신이었죠. 자칫 다른 길을 갈까 싶을 때도 ‘지금 여기서 포기하면 평생 후회할 것’이란 생각에 최선을 다했어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공부하면 저처럼 북에서 형편없던 탈북민도 한국에서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영현 씨는 그간의 그의 노력이 다른 탈북민에게 어떠한 확신을 주는 과정으로 다가갔으리라 고백한다. 아직도 잊을 수 없다는 최선의 끝에서 마주한 합격장은 다른 이들에게 분명 큰 도전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현재 대한민국에 들어온 3만 5천 명 안팎의 탈북민 중 약 180명 정도(2021. 12. 31. 기준)가 수용시설에 있다. 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적응에 어려움을 겪은 이들에게 법적 조력을 하고자 한다. 대한변협 인권재단 사무총장, 대법원 국선변호인, (사)북한인권 이사, (사)더브릿지와 (사)우리온의 각 자문위원 등 수많은 활동으로 북한인권개선과 탈북민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이영현 변호사는 오늘도 그의 꿈을 실현하는 중이다. 변호사의 은퇴 연령은 정해진 바가 없다. 이영현 씨는 북한주민들의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고 북한에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실현되는 것을 위해 멈추지 않고 나아갈 것이라는 포부를 밝혔다.


끝으로 그는 대한민국에서 꿈을 좇아 항해하는 탈북민들에게 ‘그 길이 절대 쉽지 않을 것’이란 당부를 전했다.


“우린 무한경쟁사회에 아무런 준비 없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곳에서의 생활이 결코 쉽진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해야 해요. 현실은 정말 냉혹합니다. 이 사회에서 꿈을 이루며 건강하게, 또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나 스스로 경쟁력을 갖춰야 해요. 힘을 키우는 데 꾸준히 주력해서 자기 자리를 찾아 나갔으면 좋겠어요.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꿈을 가지고, 꿈을 믿고, 포기하지 않고 정진해나가는 패기와 열정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합니다.”


이영현 씨는 과연 본인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지, 내가 정말 가고 싶은 것인지에 대한 확신을 점검해보라고 이야기한다. 더불어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먼저 행복해야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기에 꼭 행복하라는 소망을 남겼다. 믿음으로 바로 선 탈북민 1호 변호사 이영현 씨의 행복과 그 행보를 위해 기도하며, 오늘의 인터뷰를 마친다.


절대 깨어지지 않는 확신과 믿음으로 꿈을 좇은
탈북민 제1호 변호사 이영현


“제가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던
이유는 ‘믿음’이었습니다.”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꿈을 가지고, 꿈을 믿고,
포기하지 않고 정진해나가는
패기와 열정을 가져보세요.”


글 임지현  |  사진 최승대


2019년 어느 봄날, 대한민국에 탈북민 제1호 변호사가 배출됐다. 15살의 나이에 탈북해 학교를 제대로 다닌 기억이 없던 이영현 씨는 20살에 대한민국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고, 주변의 만류와 자신과의 싸움, 높디높은 문턱을 넘어섰다. 북한에선 몸소 먹거리를 찾아 나서야 했기에 학교에 다닐 형편이 안 됐다. 중국에 거주한 5년 동안엔 신분을 숨기기에 급급해 학교에 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한창 공부해야 할 나이에 펜 한 번 잡아보기 힘들었던 그는 공부에 대한 열망을 남다르게 키워나갔다.


“중국에서 페인트칠과 같은 막노동을 주로 했어요. 밧줄을 몸에 묶고 건물 외벽 페인트칠을 하다 보면 창 안 풍경을 볼 수가 있거든요. 언젠가 한 번은 창을 통해 같은 또래들이 건물 안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봤어요. 나는 밖에서 페인트칠하는데, 그 친구들은 교실에서 공부하는 상황이었죠. 마냥 바라봤는데, 교실에서 공부가 하고 싶더라고요. 공부할 기회가 있다면 무조건 열심히 해야겠다 다짐했죠.”


이영현 씨는 하루하루 먹고살기가 힘들었기에 꿈을 꾼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는 그저 공부가 하고 싶었다. 때문에 한국에 들어와 대한민국 국민의 지위를 얻은 20살의 나이에 곧장 대안학교에 입학했고, 고등학교의 공식 절차를 밟아 졸업했다. 북에서 중학교도 채 졸업하지 못했던 사실이 무색하게도 고등학생 때 꽤 우수한 성적을 냈고, 마지막 학년을 앞두고 진중히 진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떤 꿈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할지 고민하다가 저의 지난 삶을 쭉 돌아봤어요. 그랬더니 제가 만났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북한 정권으로부터 인권을 침해당하는 북한 주민들과 탈북 이후 만난 수많은 탈북민을 향한 감동이 마음 한켠에서 떠나지를 않더라고요.”


이영현 씨는 마음의 시선을 좇았고, 개인의 안락을 추구하기보다는 나라와 민족, 고향 사람들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결단했다. 그렇게 대학 진학을 앞두고, 마침내 애타게 기다리던 꿈을 찾았다. 다름 아닌, 법조인이었다. 탈북민과 북한 주민의 법적 권리와 자유를 지켜주고 보장해주는 법조인이 되겠다는 확고한 뜻을 품었다. 이후 주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선포했다. 본인은 반드시 변호사가 될 것이라고, 북한인권변호사가 될 것이라고 전하며 기도를 요청하기도 했다.



처음 결단을 선포하며 다닐 때, 그 꿈을 만류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20여 년 동안 학업 공백기가 짧지 않았고, 이제 막 알파벳과 이차방정식을 배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그가 주변의 만류에도 개의치 않을 수 있던 이유는 바로 ‘확신’이었다고 고백한다.


“처음 법학대학을 입학했을 때나, 다섯 번의 변호사시험 응시 기회 중 다섯 번째 시험을 보러 가기까지나 제가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던 이유는 ‘믿음’이었습니다. 신앙으로 말미암은 믿음, 그리고 확신이었죠. 자칫 다른 길을 갈까 싶을 때도 ‘지금 여기서 포기하면 평생 후회할 것’이란 생각에 최선을 다했어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공부하면 저처럼 북에서 형편없던 탈북민도 한국에서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영현 씨는 그간의 그의 노력이 다른 탈북민에게 어떠한 확신을 주는 과정으로 다가갔으리라 고백한다. 아직도 잊을 수 없다는 최선의 끝에서 마주한 합격장은 다른 이들에게 분명 큰 도전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현재 대한민국에 들어온 3만 5천 명 안팎의 탈북민 중 약 180명 정도(2021. 12. 31. 기준)가 수용시설에 있다. 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적응에 어려움을 겪은 이들에게 법적 조력을 하고자 한다. 대한변협 인권재단 사무총장, 대법원 국선변호인, (사)북한인권 이사, (사)더브릿지와 (사)우리온의 각 자문위원 등 수많은 활동으로 북한인권개선과 탈북민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이영현 변호사는 오늘도 그의 꿈을 실현하는 중이다. 변호사의 은퇴 연령은 정해진 바가 없다. 이영현 씨는 북한주민들의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고 북한에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실현되는 것을 위해 멈추지 않고 나아갈 것이라는 포부를 밝혔다.


끝으로 그는 대한민국에서 꿈을 좇아 항해하는 탈북민들에게 ‘그 길이 절대 쉽지 않을 것’이란 당부를 전했다.


“우린 무한경쟁사회에 아무런 준비 없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곳에서의 생활이 결코 쉽진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해야 해요. 현실은 정말 냉혹합니다. 이 사회에서 꿈을 이루며 건강하게, 또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나 스스로 경쟁력을 갖춰야 해요. 힘을 키우는 데 꾸준히 주력해서 자기 자리를 찾아 나갔으면 좋겠어요.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꿈을 가지고, 꿈을 믿고, 포기하지 않고 정진해나가는 패기와 열정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합니다.”


이영현 씨는 과연 본인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지, 내가 정말 가고 싶은 것인지에 대한 확신을 점검해보라고 이야기한다. 더불어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먼저 행복해야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기에 꼭 행복하라는 소망을 남겼다. 믿음으로 바로 선 탈북민 1호 변호사 이영현 씨의 행복과 그 행보를 위해 기도하며, 오늘의 인터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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