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타래처럼 꼬인 재중탈북민 강제북송…과연 해결책이 있을까
기자 한대의
실타래처럼 꼬인 재중탈북민 강제북송…과연 해결책이 있을까
기자 한대의
탈북민은 왜 생길까…북한에 대한 이해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동물이다. 자신을 둘러싼 주변 환경이 어떠한지에 따라 행복하거나 불행해질 수 있다. 같은 맥락으로 자식은 부모를, 국민은 국가를 잘 만나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두 가지를 선택할 수 없다. 랜덤(불규칙한 선택)이지만 일종의 ‘강요’라고 볼 수 있다. 다만 태어난 환경이 불행하다고 해서 평생 불행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가정을 부흥시키기 위해 변화를 주도하거나, 더 이상 변화할 것이 없다면 부모에게서 독립하면 된다.
국민도 마찬가지다. 태어나 보니 ‘독재국가’라고 생각해 보자. 이런 상황에선 국민이 독재자를 권좌로부터 몰아낼 수 있다면, ‘자유 시민’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노예’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필요조건이 있다. 국민인가, 아니면 ‘노예’인가다. 개념적으로 국민은 정치적 권리 행사가 가능한 주체다. 그러나 노예는 이 범주를 벗어나 모든 것이 속박된, 자의성이 없는 존재다. 현시대를 기준으로 노예는 동물권이 보장된 요즘의 동물보다 못하다. 이렇게까지 사례를 드는 것은, 21세기에도 북한과 같은 노예제 국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노예제 국가란 사람을 물건처럼 사고 팔수 있는 체제를 말한다. 그렇다면 북한은 과연 노예제 국가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주 그렇다. 대표적 사례로 북한은 주민들을 러시아와 중국에 벌목공 등 노동자로 내보내서 그들의 임금을 착취하는 것은 물론, 기타 나라로 파견한 해외노동자들의 임금까지 모조리 ‘충성 자금’이라는 명목 하에 몰수한다. 이들이 해외에서 개인적으로 버는 외화는 이렇게 북한이라는 독재국가에 귀속된다. 이게 북한이라는 현대식 노예제 사회가 주민들에게 가하는 행위다.
북한이 인간 생명을 경시하는 것도 바로 이런 노예제 사회의 기준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주민들을 총살하는 것은 북한이라는 정권이 탄생한 이래로 지금까지 일관되게 행해지고 있다. 이는 공산주의를 위시한 국가들에서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는 과거이자 현재다. 공산주의의 출발점인 마르크스의 ‘유물론’이나 현대 독재의 출발점인 북한 김일성의 ‘주체사상’이나 이 같은 인간 경시 사상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인간은 정신적 통제를 받아야 하는 대상(물건)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에선 왜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는가도 하나의 의문점이다. 이에 대한 명쾌한 답은 이미 앞서 이야기들에 다 내포되어 있다. 인권이란 개념 자체가 없는 사회 풍토상 조그마한 내부의 반발에도 주변인들까지 모두 숙청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반정부적 목소리를 내더라도 그의 부모와 친척, 친구 할 것 없이 주변의 모든 인연을 처벌한다. 이에 따라 부모가 자식을, 남편이 아내를, 형제가 형제를 자발적으로 감시하는 체계를 만든 것이다.
이런 원인 때문에 북한에선 쿠데타가 일어나기 어렵다. 오죽하면 김일성-김정일-김정은까지의 세습통치 동안 성공시킨 쿠데타가 단 한 건도 없겠는가. 그래서 북한 주민들이 선택한 것이 바로 노예제 탈출이고, 탈북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들에겐 북한에서 태어났다는 죄밖에 없다. 태어나보니 북한이었고, 정치적 선택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 보니 독재국가였다. 그나마 기회가 있는 사람은 탈북해서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탈북조차 못하는 것이다. 하나의 거대한 감옥 같은 북한 사회에서, 태어나서부터 감시를 받는 ‘트루먼 쇼’의 트루먼과 같은 처지다. 그래서 트루먼이 진실에 눈을 뜨고 새 출발을 위해 탈출한 것처럼, 북한 주민에게 유일한 기회가 바로 탈북인 것이다.
이미 북한 주민의 탈북 역사는 20년이란 세월을 훌쩍 넘겼다. 1990년대 초 ‘공산 진영’의 몰락과 함께 북한 역시 경제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사회주의 국가 간 교류는 끊기게 되고, 그들만의 시장은 사라지게 된다. ‘자유 진영’으로 편입했다면 위기를 넘길 수는 있었지만, 북한은 독재 체제가 위협받는다는 이유로 ‘공산주의’라는 정치철학을 버리지 않는다. 이에 따라 300만의 북한 주민들이 아사하고, 동사하게 된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은 살기 위해 고향을 버리고 탈북의 길에 오른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목숨을 걸고 탈북 해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