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해금 연주자 박성진


“소해금의 아름다운 선율을 더 많은 국민들에게

들려드리고 싶어요”



기자 한대의

박성진 예술가는 한국에선 보기 힘든 ‘소해금’이라는 악기를 다루는 연주가다. 평양이 고향인 그는 어릴 때 이 악기를 배우기 시작해 북한을 떠난 이후에도 꾸준히 소해금을 알리고 있다. 소해금은 ‘해금’이라는 국악기를 개량한 것으로 북한에서만 파생되고 쓰이고 있다. 소해금은 해금의 일종으로 고려시대부터 현대까지 내려오는 해금의 단점을 극복한 악기이다. 국악기인 해금은 두 줄의 명주실로만 음역대를 표현할 수 있는데, 소해금은 네 줄로 폭 넓은 음역대를 표현할 수 있다. 특히 소해금은 바이올린이 가지고 있는 현대적인 소리와 해금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소리를 두루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다음은 박성진 연주가와의 일문일답.

소해금을 배우게 된 계기가 어떻게 되나요?

 “어릴 때부터 음악에 대한 재능이 있었나 봅니다. 11살 무렵 재능을 인정받아 평양에 있는 예술대학에 입학하게 됐어요. 대한민국의 교육시스템이랑 다르게 북한의 예술대학은 9년제로, 어린 예술인들을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과정을 거치죠. 거기서 예과 3년, 전문부 3년, 학부 3년 이렇게 9년 동안 소해금을 배우고 21살 때 예술대학을 졸업했어요. 이후 군에 입대해서는 군 선전대에서 군복무를 하게 됐는데, 한국으로 치자면 군악대 같은 곳으로 보면 됩니다.”


그러면 북한에선 유능한 예술인이었겠는데 어쩌다 탈북하게 되었나요?

“우연찮게 지인 결혼식에 가서 노래를 부르게 됐는데, 그때 한국 노래를 불렀어요. 대부분의 북한 노래는 김부자(당시 김일성·김정일)를 찬양하는 노래여서 결혼식 초대 노래로는 맞지 않아 한국 노래를 부른 것이지요. 북한에서 부자들은 결혼식 시작과 끝을 모두 촬영해서 남겨두는 풍습이 있는데, 그 촬영본이 사회에 퍼지다보니 한국 노래를 불렀던 제가 문제가 된 거죠. 그래서 당기관에서 처벌을 받게 됐고, 그 일로 혁명화라고 지방으로 추방을 가게 됩니다. 당시 혁명화로 배치 받은 곳이 황해남도였는데, 남과 북이 전쟁을 한다고 정세가 안 좋을 때였죠. 우연히 남쪽에서 보낸 삐라(전단)를 보고 남한 상황을 알게 된 거죠. 북한에서 그동안 배웠던 모든 역사나 그런 것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됐고, 그래서 탈북을 결심하게 된 거죠”

 

탈북하는 과정이 상당히 위험했겠는데 어떻게 오셨나요?

“저의 아버지 고향이 경상남도 마산이에요. 그리고 저희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일본에 사셨고, 아버지도 일본에 살다가 북한에 가신 분이라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와 개념이 굉장히 높았죠. 제가 혁명화를 받고 나서 아버지와 가족들도 모두 고향 남한으로 내려오자고 결심을 하게 됐고, 그래서 함께 탈북을 한 거죠.

 

 오는 과정은 아시다시피 북중 국경지역을 지키는 군인들에게 일종의 카바비(브로커비)를 주고 두만강을 넘었어요. 사실 두만강을 넘을 때는 쉬웠죠. 그런데 중국에 도착해서 저희 누나가 안타깝게도 중국 공안에 붙잡혀 북송을 당했죠. 남은 가족들은 무사히 한국에 오게 됐지만 당시 북송당한 누나는 오지 못했어요. 지금은 황해북도 어딘가로 추방당해 살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고, 현재 생사는 모르고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면 한국에 와서는 어떤 일부터 하셨나요?

 “제가 소해금을 연주하다보니 북한에 부탁을 해서 악기를 구해왔죠. 국내엔 하나밖에 없는 악기라 여러 곳에서 불러줘서 연주를 하곤 했죠. 다만 대한민국 국민들도 국악에 대해선 관심이 있는 터라 오히려 희소성이 있어서 많은 공연들을 했던 것 같아요.”

 

한국에서도 소속사에 들어가서 음악활동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소속사였나요?

 “가수 장윤정 소속사였는데요. 당시 장윤정씨를 비롯해서 많은 가수들과 공연도 하면서 음악활동을 했죠. 지금은 계약이 끝나 따로 활동하고 있어요. 최근엔 시립음악단과 협연을 하고 있고요. 근래부터는 안산시립단에서 공연하고 있어요.”

 

한국에서 소해금 연주자로 유일무이한데 혹시 후배 교육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신지요?

“물론 교육에 대한 열의는 있는데, 소해금을 구입하기가 상당히 어렵고, 대신 만들자고 하니 너무 많은 비용이 들어서 그 꿈은 접었죠. 악기가 있어야 교육을 하든 하는데 제작하려고 하니 만만치가 않더라구요. 현실적인 문제라 생각돼서 지금 현재는 접은 상태에요. 나중에 여유가 된다면 그때 다시 생각해보려구요.”

혹시 한국 예술계에서 활동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없었나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저는 북한에서 오신 다른 분들보다는 전공을 잘 살려 아무탈 없이 저의 길을 잘 가고 있어요. 보통 북한과 남한의 교육 시스템이 다르잖아요. 다른 분야는 탈북민들이 괴리감을 많이 느껴 전공을 못 살리지만 음악은 다르더라구요. ‘도레미파솔라시도’는 전 세계 공통으로 사용하는 거라서 음악 활동을 하면서 큰 어려움은 없었던 것 같아요. 오히려 특수 악기라고 해서 다른 아티스트 분들에 비해 굉장히 대우를 잘 받은 것 같아요. 많은 도움을 받았고, 많은 공연도 하고, 만족스럽게 연주하며 살고 있어요.”

 

앞으로 어떤 길을 가고 싶으신가요?

“사실 대한민국에 와서 친구도 없고, 학연, 지연도 없어 내 자신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10년이란 시간동안 음악활동을 하면서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공연을 하다 보니 소외를 받는 분들이 상당히 많더라구요. 그래서 어려운 분들을 위해 자선공연도 자주 했죠. 근래엔 코로나로 주춤했던 자선공연을 조금씩 늘려가고 있어요. 앞으로도 소해금 연주자로 더 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소해금의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드리고 싶어요. 특히 음악치유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체계적으로 음악활동을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음악을 전공하는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차별 없는 세상은 어디에도 없어요. 그래도 예술분야는 우리 탈북민들에게 오히려 프리미엄이 얹혀 지는 분야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예술가로 살아가면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열심히 했으면 좋겠어요. 특히 바닥부터 철저히 닦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멀리 내다보고 예술가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말 음악을 전공하는 분들은 프로 정신을 가지고 노력하길 바라고요, 물론 눈에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 같은 벽이 분명히 존재할 터이지만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타개해나가길 바라요. 감사한 마음가짐으로 하다보면 가치도 있고 보람도 있는 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소해금 연주자 박성진


“소해금의 아름다운 선율을

더 많은 국민들에게

들려드리고 싶어요


기자 한대의

박성진 예술가는 한국에선 보기 힘든 ‘소해금’이라는 악기를 다루는 연주가다. 평양이 고향인 그는 어릴 때 이 악기를 배우기 시작해 북한을 떠난 이후에도 꾸준히 소해금을 알리고 있다. 소해금은 ‘해금’이라는 국악기를 개량한 것으로 북한에서만 파생되고 쓰이고 있다. 소해금은 해금의 일종으로 고려시대부터 현대까지 내려오는 해금의 단점을 극복한 악기이다. 국악기인 해금은 두 줄의 명주실로만 음역대를 표현할 수 있는데, 소해금은 네 줄로 폭 넓은 음역대를 표현할 수 있다. 특히 소해금은 바이올린이 가지고 있는 현대적인 소리와 해금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소리를 두루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다음은 박성진 연주가와의 일문일답.



소해금을 배우게 된 계기가 어떻게 되나요?

 “어릴 때부터 음악에 대한 재능이 있었나 봅니다. 11살 무렵 재능을 인정받아 평양에 있는 예술대학에 입학하게 됐어요. 대한민국의 교육시스템이랑 다르게 북한의 예술대학은 9년제로, 어린 예술인들을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과정을 거치죠. 거기서 예과 3년, 전문부 3년, 학부 3년 이렇게 9년 동안 소해금을 배우고 21살 때 예술대학을 졸업했어요. 이후 군에 입대해서는 군 선전대에서 군복무를 하게 됐는데, 한국으로 치자면 군악대 같은 곳으로 보면 됩니다.”


그러면 북한에선 유능한 예술인이었겠는데 어쩌다 탈북하게 되었나요?

“우연찮게 지인 결혼식에 가서 노래를 부르게 됐는데, 그때 한국 노래를 불렀어요. 대부분의 북한 노래는 김부자(당시 김일성·김정일)를 찬양하는 노래여서 결혼식 초대 노래로는 맞지 않아 한국 노래를 부른 것이지요. 북한에서 부자들은 결혼식 시작과 끝을 모두 촬영해서 남겨두는 풍습이 있는데, 그 촬영본이 사회에 퍼지다보니 한국 노래를 불렀던 제가 문제가 된 거죠. 그래서 당기관에서 처벌을 받게 됐고, 그 일로 혁명화라고 지방으로 추방을 가게 됩니다. 당시 혁명화로 배치 받은 곳이 황해남도였는데, 남과 북이 전쟁을 한다고 정세가 안 좋을 때였죠. 우연히 남쪽에서 보낸 삐라(전단)를 보고 남한 상황을 알게 된 거죠. 북한에서 그동안 배웠던 모든 역사나 그런 것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됐고, 그래서 탈북을 결심하게 된 거죠”

 

탈북하는 과정이 상당히 위험했겠는데 어떻게 오셨나요?

“저의 아버지 고향이 경상남도 마산이에요. 그리고 저희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일본에 사셨고, 아버지도 일본에 살다가 북한에 가신 분이라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와 개념이 굉장히 높았죠. 제가 혁명화를 받고 나서 아버지와 가족들도 모두 고향 남한으로 내려오자고 결심을 하게 됐고, 그래서 함께 탈북을 한 거죠.

 

 오는 과정은 아시다시피 북중 국경지역을 지키는 군인들에게 일종의 카바비(브로커비)를 주고 두만강을 넘었어요. 사실 두만강을 넘을 때는 쉬웠죠. 그런데 중국에 도착해서 저희 누나가 안타깝게도 중국 공안에 붙잡혀 북송을 당했죠. 남은 가족들은 무사히 한국에 오게 됐지만 당시 북송당한 누나는 오지 못했어요. 지금은 황해북도 어딘가로 추방당해 살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고, 현재 생사는 모르고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면 한국에 와서는 어떤 일부터 하셨나요?

 “제가 소해금을 연주하다보니 북한에 부탁을 해서 악기를 구해왔죠. 국내엔 하나밖에 없는 악기라 여러 곳에서 불러줘서 연주를 하곤 했죠. 다만 대한민국 국민들도 국악에 대해선 관심이 있는 터라 오히려 희소성이 있어서 많은 공연들을 했던 것 같아요.”

 

한국에서도 소속사에 들어가서 음악활동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소속사였나요?

 “가수 장윤정 소속사였는데요. 당시 장윤정씨를 비롯해서 많은 가수들과 공연도 하면서 음악활동을 했죠. 지금은 계약이 끝나 따로 활동하고 있어요. 최근엔 시립음악단과 협연을 하고 있고요. 근래부터는 안산시립단에서 공연하고 있어요.”

 

한국에서 소해금 연주자로 유일무이한데 혹시 후배 교육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신지요?

“물론 교육에 대한 열의는 있는데, 소해금을 구입하기가 상당히 어렵고, 대신 만들자고 하니 너무 많은 비용이 들어서 그 꿈은 접었죠. 악기가 있어야 교육을 하든 하는데 제작하려고 하니 만만치가 않더라구요. 현실적인 문제라 생각돼서 지금 현재는 접은 상태에요. 나중에 여유가 된다면 그때 다시 생각해보려구요.”

혹시 한국 예술계에서 활동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없었나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저는 북한에서 오신 다른 분들보다는 전공을 잘 살려 아무탈 없이 저의 길을 잘 가고 있어요. 보통 북한과 남한의 교육 시스템이 다르잖아요. 다른 분야는 탈북민들이 괴리감을 많이 느껴 전공을 못 살리지만 음악은 다르더라구요. ‘도레미파솔라시도’는 전 세계 공통으로 사용하는 거라서 음악 활동을 하면서 큰 어려움은 없었던 것 같아요. 오히려 특수 악기라고 해서 다른 아티스트 분들에 비해 굉장히 대우를 잘 받은 것 같아요. 많은 도움을 받았고, 많은 공연도 하고, 만족스럽게 연주하며 살고 있어요.”

 

앞으로 어떤 길을 가고 싶으신가요?

“사실 대한민국에 와서 친구도 없고, 학연, 지연도 없어 내 자신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10년이란 시간동안 음악활동을 하면서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공연을 하다 보니 소외를 받는 분들이 상당히 많더라구요. 그래서 어려운 분들을 위해 자선공연도 자주 했죠. 근래엔 코로나로 주춤했던 자선공연을 조금씩 늘려가고 있어요. 앞으로도 소해금 연주자로 더 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소해금의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드리고 싶어요. 특히 음악치유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체계적으로 음악활동을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음악을 전공하는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차별 없는 세상은 어디에도 없어요. 그래도 예술분야는 우리 탈북민들에게 오히려 프리미엄이 얹혀 지는 분야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예술가로 살아가면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열심히 했으면 좋겠어요. 특히 바닥부터 철저히 닦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멀리 내다보고 예술가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말 음악을 전공하는 분들은 프로 정신을 가지고 노력하길 바라고요, 물론 눈에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 같은 벽이 분명히 존재할 터이지만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타개해나가길 바라요. 감사한 마음가짐으로 하다보면 가치도 있고 보람도 있는 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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